
한반도 깊은 산속, 세상의 시간으로부터 단절된 아사달골에는 고요한 봄이 찾아왔다.
배꽃이 만발하고 계곡물 소리가 청량하게 울리는 이곳은 단군이 나라를 세웠던 아사달의 정신을 잇는 이들이 대대로 숨어 살던 곳이었다.
50여 명 남짓한 주민들은 모두 평범한 듯 보였지만, 그들 모두에게는 숨겨진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 힘을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 경고했다. 그 힘은 개인을 곤란하게 할 뿐 아니라, 외부 세계의 질서를 뒤흔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화연은 아사달골에서 가장 밝은 아이였다.
그녀의 능력은 아직 미숙했지만, 시든 꽃에 손을 대면 작은 생기가 돌아오고, 낡은 토기에 깃든 과거의 희미한 잔상을 보기도 했다.
마을 어른들은 그런 이화연을 보며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그녀가 선조들의 힘을 가장 강하게 물려받은 '마지막 후예'임을 알고 있었다.
마을의 평화는 이화연의 오빠, 이시윤의 귀환으로 깨졌다. 그는 더 넓은 세상을 보겠다며 몇 년 전 마을을 떠났었다.
하지만 돌아온 오빠의 모습은 예전과 달랐다. 그의 눈빛에는 쫓기는 자의 공포가 서려 있었고, 몸은 알 수 없는 병으로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가족들은 오빠를 반기면서도 그를 감싼 차가운 공기에 걱정을 금치 못했다.
이시윤은 그저 묵묵히 침묵할 뿐이었다.
밤낮으로 오빠를 간호하던 이화연은 어느 날 그의 손을 잡다, 자신도 모르게 숨겨진 힘을 발현하게 된다.
그녀의 눈앞에 섬광처럼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일본군에게 무자비하게 고문당하는 오빠의 모습, 그리고 오빠가 필사적으로 지켜냈던 작은 상자 속에 담긴 피 묻은 태극기.
그녀는 오빠의 병이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독립운동에 가담하며 겪었던 고문과 고통의 결과임을 깨닫게 된다.
오빠의 죽음은 이화연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아사달골의 평화로운 풍경은 더 이상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빠의 환영은 그녀의 마음속에 강한 연민과 사명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을 어른들은 이화연에게 오빠의 죽음이 외부 세계와 단절해야 하는 이유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들은 그녀의 힘이 파멸을 불러올 것이라며 경고했다.
하지만 이화연은 고뇌 끝에 결심한다. 자신에게 부여된 힘이 오빠와 같은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라 믿었다.
그녀는 조용히 짐을 꾸렸다. 아사달골의 정령들이 그녀의 떠나는 뒷모습을 슬픔과 함께 지켜봤다.
그렇게 이화연은 고조선 왕실의 마지막 후예로서, 그리고 오빠의 죽음을 외면할 수 없는 한 사람으로서, 미지의 도시 경성으로 향하는 첫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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